
Agglobe 이야기
1987년, 김필주 박사는 연합 장로교 뉴욕 사무소 소장인 이승만 목사를 만남으로 이야기는 시작됩니다. 그는 북한의 식량 부족 문제를 설명하고 옥수수 종자를 개선시키는 씨앗 과학자로서 김박사에게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이듬해 김필주 박사는 유엔 북미 선교회에서 집으로 걸려온 전화를 받았습니다. 그들은 그녀와 그녀의 남편 (축산업 전문가)에게 북한을 여행하고 더 높은 수확량의 옥수수 종자를 개발하도록 도울 것을 요청하기 위해 북한으로 초청했습니다.
김필주 박사와 그녀의 남편은 북한을 방문하기 위한 초청장을 받았을 때 공산주의 국가인 북한을 방문하는 것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하였습니다. 김박사와 그녀의 남편은 북한 농업 생산을 증진시키는 데 도움이되는 그들이 가지고 있는 전문 지식을 사용하는 것에 대해 깊은 아픔을 느꼈습니다. 오랜 고민 끝에, 그들은 농업을 연구하는 그들의 우선적인 목적이 "가난한 사람들과 불우한 이웃을 위한 식량 안보를 개선하는 데 도움을 주는 것"에 서로 의견일치를 보았고, 북한으로의 초대를 수락하기로 결정했습니다.
1989 년 3 월 17 일 난생 처음으로 조선 민항 (당시 북한 항공사 이름)에 두려움과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탑승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건 그들에게 있어서 귀한 경험이었습니다. 특별히 북한에서 태어났지만 1945년 어린 소녀로서 그 곳을 떠나야 했었던 김필주 박사에게는 커다란 경험이었습니다.
그들이 평양 선안 공항에 도착했을 때, 아주 잘 생기고 너그러운 웃음을 가진 젊은 청년 가이드가 그들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그는 한국어로 말을 하였고, 그 순간 그들 마음에 있던 불안함과 두려움은 눈 녹듯이 사라졌습니다.
1989년, 북한이 자체적으로 식량 수요에 있어서 자랑스러워 하고 있었으나, 김필주 박사와 그의 남편은 북한의 농업 생산성에 대한 문제를 이미 느낄 수 있었습니다. 1990 년대 초반까지 여러 자연재해들로 인해 경제가 악화되고 가파른 에너지 비용 상승은 북한의 식량 공급 능력을 저해하기 충분했습니다. 공공 분배 시스템이 붕괴되었고 기근이 발생했습니다. 또한 식량 부족 때문에 거의 백만 명이 사망했습니다.
그들은 기독교를 믿는 믿음의 사람들로서 농부들의 농업 능력 개발을 돕고 북한 사람들을 돕는 것이 그들의 의무라고 다짐하게 되었습니다. 그녀의 첫 방문 이후, 김 박사는 100 번 이상 북한을 방문하였고 그녀가 지닌 전문 지식과 수백만 달러의 인도주의 차원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그리하여 김필주 박사는 여러 협력 농장들의 장기적인 능력을 향상시키기 위해 정부와 최초로 계약을 맺게 되었습니다.

